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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창고/캐릭터 스토리

다면적인 사생활과 사고방식을 소유한 배우 리차드 버튼의 사생활

by winter-art 2023. 10. 28.

리처드 버튼의 몰락은 데뷔 초부터 예견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를 꼭 닮았던 것인지 자신이 엄청난 대주가라는 것을 자랑했고 바람둥이로도 유명했습니다. 똑똑하기로도 유명했으니 건방진 유머와 위트 그리고 자기 비하적인 재치도 남달랐다고 합니다.

 

 

 

자본주의 꿀빨면서 세금 덜 내려고 스위스에서 산 좌파 배우

 

 

 

 

리처드 버튼은 세상에 쿨한 척하면서 정치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지만 그는 평생 무신론자에 사회주의자로 살았는데요. 배우로 막대한 돈을 버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은  자본주의 꿀을 빨면서 좌파적 견해를 갖는 것에 모순을 느낀다고 하지 않는다면서 자신이 공산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노동자 집안에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리차드 버튼 집안의 가난은 사회적 불평등이 아닌 아버지의 절제를 모르는 알코올 중독 습관 때문이라는 것을 왜 모르나 모르겠습니다. 술만 안 마셨어도 그의 집안은 제법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면서 세금은 안 내겠다고 스위스에서 산 얍삽함이 피부와 표정에서 느껴집니다.

 

 

 

 

그리고 리차드 버튼의 마지막 영화는 1984년 조지 오웰의 소설을 각색한 1984였으며 작품 속에서도 그는 오브라이언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버튼은 그해 1984년 8월 5일 스위스 자택에서 뇌출혈로 사망했습니다.

 

 

 딜런 토마스를 흠모한 배우

 

 

나는 웨일스다. 나는 술고래다. 나는 인류 그중에서도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이다,는 1930년대를 대표하는 영국의 시인 딜런 토마스가 한 말입니다. 그를 너무 좋아해서 자신의 예명으로 쓴 밥 딜런과 존 레넌에게 영감이 된 인물이기도 하고 리처드 버튼이 가장 사랑한 문학가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리차드는 웨일스 출신에 술고래에 여자를 너무 사랑해서 폐인이 된 케이스입니다. 토마스 딜런이 39세에 객사한 것처럼 리처드 버튼도 58세에 뇌출혈로 사망하였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세기의 사랑 혹은 세기의 불륜

 

 

 

 

뛰어난 연기력 그러나 천박한 사생활로 몰락한 리차드리처드 버튼은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 불린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남자이기도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죽기 전 리처드 버튼의 고향 땅에 묻히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그를 잊지 못했습니다. 정작 리처드 버튼은 사람들에게 말하길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멋진 눈동자를 지닌 것은 맞지만 그녀는 이중턱에 투머치 가슴에 다리가 좀 짧은 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는 여자여 당신이 아름답다는 것을 누가 말해준 적이 있나요?라고 플러팅을 했으면서 말입니다.

 

 

 

 

물론 리차드 버튼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평생 사랑했으며 죽는 날까지도 잊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또한 자신이 죽으면 그의 고향에 묻어달라고 했을 정도로 둘의 사랑은 각별함이 있었습니다.

 

 

연기 천재라고 부를만한 

 

 

잘생긴 편의 다소 거칠고 투박한 외모 그리고 흡입력 있는 자태 그리고 비교대상이 없는 목소리의 소유자였던 그는 주변인들에게 괴물 같은 완벽주의자 혹은 문제 많은 영혼으로 불렸습니다. 뭔가 다중적이며 다면적인 성향이었던 것 같은데요. 

 

 

 

 

진지하고 매력적이고 엄청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연극 계에서 엄청난 추앙을 받았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연극 배우와 영화배우를 병행하면서 매우 유명해졌고 세계적인 배우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가 세계적인 악명을 떨친 데는 엘리자베스와의 스캔들도 크게 한몫했을 테고요. 또한, 그의 찬란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스카상이나 아카데미상 후보에 가장 많이 올랐음에도 한번도 상을 받지 못했고 기사 작위를 받은 적이 없는 가장 유명한 영국 출신 배우이기도 했습니다. 

 

 

 

가난한 집안의 천재

 

리차드리처드 버튼은 가난한 환경에 거친 성격, 거의 원시인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방치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요. 그런 환경 속에서도 리처드의 총명함은 남달랐다고 합니다. 그의 큰 형 이포르는 리처드의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두었고 너라도 공부를 잘해서 집안을 일으켜라며 주입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집안에서 유일하게 중등교육을 받게 됩니다. 리처드는 모든 면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말똥을 치우고 신문 배달로 용돈을 버는 가운데도 운동은 물론 음악과 문학 모든 면에서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학비가 없어 학업을 포기할 시점에 학교 선생 필립 버튼이 그를 알아보고 그의 후견인이 되기로 합니다. 그의 양자로 입적된 후 리차드는 젠킨스 대신 버튼의 성을 쓰게 됩니다. 

 

필립의 후원과 교육 덕분에 리차드 버튼은 옥스퍼드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였습니다. 리차드 버튼은 연극과 문학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습니다. 

 

 

 

1953년에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멜라니 역을 맡았던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주연의 나의 사촌 레이첼에 출연하여 첫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연극 무대에서 햄릿을 연기하게 되었고 대중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1953년은 리차드 버튼에게 의미가 있는 해였습니다. 텔레비전 시대가 도래하면서 영화 스튜디오는 도태되지 않으려고 스타 배우를 물색 중이었고 텔레비전과는 다른 화면 비율로 차별화를 꾀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간택된 리차드리처드 버튼은 최초로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한 작품 <성의>가 초초초 대박을 치면서 리처드 버튼은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영화사도 한숨을 돌렸고요. 그리고 이 영화 이후로 수많은 성경 서사의 종교 영화가 우후죽순 개봉했다고 합니다. 돈을 벌기 시작한 리차드 버튼은 1957년 아내 시빌과 함께 세금 납부가 덜한 스위스 쎌리늬로 이주해 영국 정부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세기의 불륜 시작

 

 

 그러다 1960년 인생의 전환점이 된 영화 카멜롯 이후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클레오파트라에 남주로 캐스팅되면서 이들은 운명적인 사랑 아니 불륜에 빠지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리차드 버튼과 태어난 환경부터 달랐고 그녀는 이른 나이에 데뷔하여 이미 세계적으로 잘 나가는 대배우였으며 네 번째 결혼을 한 상태였습니다.

 

 

첫눈에 반한 이들은 영화 속에서 연기가 아닌 진짜 사랑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불륜 커플로 뉴스를 장식하기 시작했습니다. 1962년 영화 촬영을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간 리처드 버튼을 대중은 냉소적으로 보는 편이었지만 엘리자베스 테일러하고 스캔들이 난 후 그의 몸값도 올랐습니다. 영화 한 편에 15만 달러를 받던 그가 백만 달러 계층으로 올라선 겁니다.

 

 

 

 

 

사실 영화가 끝난 후 리차드 버튼은 가정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음독자살 시도까지 하고 그의 아내 시빌은 이혼을 원했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에디 피셔와 이혼했습니다. 이들의 불륜이 얼마나 쇼킹했던지 바티칸에서도 관심을 가질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미국 국회에서도 도덕성을 해친다며 국무부에 비자 취소 요청까지 했을 정도라네요. 

 

 

아무튼, 이 논란의 중심이 된 32살과 38살의 커플은 1964년 3월 15일 캐나다 몬트리올의 한 호텔에서 결혼을 했고 누구보다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이미 전 재산을 위자료로 탕진한 상태에서 리처드 버튼은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버는 족족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사치를 부리기 바빴습니다.

 

 

 

 

사랑에 눈이 멀면 어떻게 몰락하는지 교과서로 삼아도 될 정도인데요. 버튼은 애완견 전용 요트를 구입하고 롤스로리스 자동차를 타고 유명 화가의 작품을 사들이고 보석 좋아하는 테일러에게 30만 달러가 넘는 다이아몬드를 선물했으며 백만 달러에 달하는 까르띠에 다이아몬드와 진주 등을 그녀에게 선물했습니다. 

 

또한, 어릴 적부터 대접 받는 게 익숙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혼자서는 조금도 돌아다닐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테일러에겐 이런 환경이 익숙했고 당연하게 여겼지만 이런 불편함이 리처드 버튼을 더욱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몰락의 전조

 

그리고 그의 불행 아니 몰락의 전조는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리차드 버튼의 스위스 집에 놀러 온 그의 큰형 이포르와 밤새 술을 마시다가 형이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목이 부러졌고 이로 인해 전신 마비가 되었습니다. 결국 형은 1972년에 사망하였고 리처드는 그에 대한 죄책감과 슬픔으로 더 많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가족 내력인 것인지 절제를 모르는 음주와 바람끼로 인해 1974년 둘의 관계는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다시 뭐에 홀렸는지 둘은 1975년 10월 10일 두 번째 결혼을 하였고 1976년 7월 다시 이혼했습니다. 

 

 

리차드 버튼의 50대는 이미 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웨일스의 시궁창에서 온 버릇없는 천재에 술주정뱅이와 바람둥이란 평판을 즐겼습니다. 그는 자신의 롤러코스트 같은 인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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