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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ter book/성경 자의적 해석

성경 속 바알을 섬긴 이유

by winter-art 2025. 4. 7.

모세의 입을 통해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살게 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 땅에 입성하였고 이들은 땅을 배분받아 정착하게 살게 됩니다. 하지만 젖과 꿀은 농경이나 정착에 적합한 산물이 아니었습니다.

 

바알을 섬긴 이유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겼다는 말을 들을 때면, 우린 으레 그것을 단순한 우상 숭배의 타락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러나 바알은 단지 '신'이 아니었습니다. 바알은 가나안 땅에 오래전부터 깊게 뿌리내린 생존의 체계이자, 자연을 지배하는 질서의 상징이었습니다. 바알은 비를 내리고, 곡식을 자라게 하며, 여신 아스다롯과 함께 다산과 생산을 관장하는 농경사회의 총합적 시스템이었습니다. 즉, 그는 단순한 돌조각이 아니라, 삶 자체를 설명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반대로 여호와는 유목의 신이었습니다. 그는 형상 없이 나타났고,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물, 말씀과 장막으로 백성과 함께 움직였습니다. 여호와는 자리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동하며 함께하되, 눈에 보이지 않았고, 손에 쥐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와의 관계는 형상이 아니라 말씀과 기억을 통해 유지되었습니다. 바알이 ‘보이는 신’이었다면, 여호와는 ‘기억되는 신’이었습니다.

 

 

가나안은 유목이 아닌 농경에 적합한 땅

 

문제는, 이스라엘이 마침내 도착한 약속의 가나안이 바로 바알의 질서가 지배하는 농경의 땅이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젖과 꿀은 엄밀히 말하면 목축과 자급채집의 산물입니다. 즉, 자연이 ‘이미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가나안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땅은 갈아야 했고, 비는 기도 없이 내리지 않았고, 생존은 노동과 제의에 달렸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은혜로 주어진 땅’을 살아가기 위해 바알의 체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땅을 열두 지파에게 분배했습니다. 정착은 필연적으로 농경을 의미했고, 농경은 다시 바알 시스템에의 적응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에게 바알은 유혹이 아니라 생존의 논리였습니다. 그 땅에서 비가 내려야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농사를 지어야 자식들을 먹일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설명 체계가 바알이었습니다. 그렇게 여호와는 점점 더 기억의 저편으로 밀려났고, 대신 바알이 삶의 중심으로 들어왔습니다.

 

배도라고 하는 이유

 

하지만 성경은 이 선택을  배도라고 합니다. 단지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농사의 해석자 자리를 바알에게 넘겨줬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농사를 짓지 말라 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그 땅과 생명의 주권이 여전히 자신에게 있음을 기억하라 했을 뿐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바알을 통해 비를 구하고, 다산을 원하고, 삶의 안정을 조작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간절함이 맹신으로 이어진 것이죠. 그런데 이런 것을 배도라고요?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이 그렇게 옹졸하고 모순적일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 모든 구조 속에서 더 본질적인 문제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점점 기득권 구조의 정당화 도구로 쓰이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땅을 나누었고, 제사장들은 율법을 해석했고, 왕은 신의 명령을 말하며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여호와는 이제기억되는 아니라, ‘팔리는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정작 여호와는 맹목적 믿음이나 충성만을 원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비극은 단지 ‘우상 숭배’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하나님을 팔아 자기 권력을 강화하려는 자들의 역사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거래하고, 대체 가능하게 만든 자들의 실패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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