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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창고

연산군 때 있던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관하여

by winter-art 2023. 1. 20.

조선시대 10대 군주 참혹한 연산군 때 있던 대표적인 사건으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있습니다. 어릴 적에는 무오, 갑자, 병자니 이게 뭔 말인가 했더니만 육십갑자를 의미하는 거였네요.  그러니까 무오년에 일어난 사화, 정유년에 있던 전쟁 이런 겁니다. 그냥 달달 외우고 그리 배운 터라 몰랐네요. 아무튼 무오사화 이후 육십갑자로 따지면 6년 뒤에 일어난 사화가 갑자사화겠네요. 무오사화는 1498년 갑자사화는 1504년에 생긴 사건입니다.

 

10대 군주 폭군 연산군에 관하여

 

연산군은 성종의 장남이며 조선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유교 정치 자체를 부정한 인물이며 당시 기준으로의 언론을 엄청 탄압하였습니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연산군이 신하들에게 신언패를 목에 차고 다니게 했다는데요.

 

 

이 신언패는 살고 싶으면 입조심하라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모자에는 충성 글자를 썼다나 뭐라나. 게다가 음주가무에 능해서 그것도 성균관에 기생들을 불러다가 댄스파티를 수시로 열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모잘라 신하들을 쥐 잡듯 잡아 죽여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키며 공포에 떨게 하였습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발단이 된 무오사화

 

무오사화는 1498년에 생긴 사건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사림의 보스 김종직이 과거 조의제문이란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조의제문이란 의제를 조하는 제문을 의미합니다. 의제는 초나라 회향을 의미합니다. 항우가 진의 시황제 죽음 후 거병의 구심점을 찾기 위해 초나라 왕손을 데려와 왕으로 옹립하고 황후가 봉기를 하였습니다. 나중에 자신이 권력을 잡고 나니 초혜왕이 걸림돌이 되어 그의 허리를 꺾어 죽였듯 수양대군이 자기 조카를 비참하게 죽인 것을 은유적으로 깐 내용이 들어가 있는 것이 조의제문입니다. 문제는 김종직은 이미 죽었고 그의 애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을 때 자기 스승의 의리 넘치는 글을 역사 기록에 남기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사초에 기록을 남기고 말았네요. 즉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적어 놓는 기록장 같은 것인데 이것을 나중에 왕실 기록을 적는 당상관 이극돈과 유자광이 이 글을 보고 연산군에게 고하게 됩니다. 연산군 입장에서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하는, 즉 자기 증조할아버지를 욕보이는 글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사초는 임금이 직접 볼 수 없게 제정된 문서였습니다. 이에 연산군이 사초를 직접 볼 수 없으니 김종직의 관을 꺼내 부관참시합니다.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아 김종직의 여러 제자들을 처벌한 것이 바로 무오사화입니다. 눈엣 가시 같던 신하들 잘 걸렸다 하면서 줘 팬 거죠.

 

1504년 또 한 번 발칵 뒤집힌 갑자사화가 일어난 배경

 

연산군 폭정의 최고 하이라이트를 장식한 갑자사화에 알아보겠습니다. 너무도 많은 영화나 드라마 소재로 사용했음에도 질리지 않는 소재로 사용될 것 같습니다. 갑자사회는 연산군 생모 폐비 윤 씨에 관련이 있습니다. 9대 군주였던 성종의 본처는 한명회의 딸 한 씨 부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하고 십 대 중반의 나이에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인도 명을 다하지 못하고 단명하였습니다. 당시 성종의 후궁이 많았는데 경합을 벌여 중전을 간택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우승한 분이 바로 폐비 윤 씨입니다. 참고로 채시라가 나온 드라마 인수대비가 아주 꿀잼입니다. 폐비 윤 씨와 인수 대비의 배틀 구경하고 싶은 분은 채시라의 인수대비를 추천합니다. 채시라의 연기력이 만렙입니다. 인수대비역의 전혜빈이 좀 많이 부족하긴 했지만요.

 

 

각설하고 갑자사화 얘기를 하기 전 성종에 관해 짧게 얘기하고 가겠습니다. 성종은 의경세자 도원군의 아들입니다. 바로 도원군의 안사람이 인수대비고요. 어찌나 어머니 포스가 후덜덜한지 성종은 99.9% 마마보이였을 거라고 짐작하는 이들이 지배적입니다. 인수대비는 의경세자가 죽자 성종을 아들 겸, 애인겸, 남편처럼 의존하여 며느리 윤비와 갈등이 심한 편이었습니다.

 

 

어느 날 윤비와 성종이 부부싸움이 일어나서 윤비가 성종의 얼굴을 할퀴었는데 이를 본 인수대비가 조선 대간들을 부추겨서 덕이 없는 윤비를 폐비시키라고 난리난리 그래서 윤비가 쫓겨납니다. 그러나 너무 우격다짐으로 윤 씨를 쫓아내서 후환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화근을 잘라내기 위해 폐비에게 사약을 내리고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성종은 이후 다시는 이 일을 거론하지 말라고 하였고 연산군은 워낙 어릴 때 일이라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조선 간신의 대명사 임사홍의 고자질 후폭풍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고하지만 않았어도 연산군은 성군이 되었으려나요. 연산군이 왕이 된 후 임사홍이 폐비 윤 씨의 친모 그러니까 연산군의 외할머니를 모시고 궁궐에 나타납니다. 외할머니도 참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시지. 손자 앞에서 과거 사건을 낱낱이 고해바칩니다. 피를 토했던 적삼을 보여주면서 사건 극대화 하고요. 그러니 연산군이 완전 돌아버립니다. 연산군은 곤장을 가지고 성종의 후궁인 엄귀인과 정귀인을 때려죽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사건의 원인 제공자는 인수대비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인수대비는 이미 생이 오늘내일하고 있던 상태였기에 연산군은 인수대비 침전에서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고 발광을 합니다. 그러면서 당시 기록을 다 찾아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엄마 죽이는데 가담했던 사람들 다 찾아내서 죽이라고 하는 등 잡들이도 이런 잡들이가 없었는데요. 엄밀히 말하면 사화는 아니지만 넓은 의미로는 사화로 볼 수 있고 또한,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었다고 해서 사화로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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