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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창고

한국사 조선의 관리 등용제도에 관하여

by winter-art 2022. 12. 8.

고려 시대에 비해 비교적 문무 양반 제도가 확립되었다고 평가받는 조선 시대에는 어떻게 출세길에 오르고 관리가 될 수 있었을까요? 외우는 공부를 할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관심을 갖고 보기 시작하면 꽤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입니다. 

 

조선시대 과거 제도의 꽃은 문과

 

 

조선 시대에 출세하려면 좋은 집안 출신에 과거 시험만 잘 보면 만사형통이죠. 하지만 현대 사회라고 별로 다를 건 없어 보입니다. 예부터 공부하면 대접받는 나라여서 그런지 외세에 침입을 그리 받고도 제대로 무장할 생각은 않고 주야장천 공부만 하던 우리나라 선비님들 근성은 근대화 이후 많이 변화되어 후손들이 체력은 국력이다를 잘 실천하고 있는데요. 뿌리 깊은 공부병은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조선 시대 과거 제도의 꽃 중의 꽃 문과는 조선 중기 이후에는 소과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문과를 치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비 시험격인 소과를 먼저 응시하였는데요. 초시와 복시가 치러지고 지역별 도별로 한성부와 팔도에 정원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원 700명 진사과 700명 합해서 1400명을 뽑았다고 합니다. 인구도 적었을 텐데 생각보다 많이 뽑았네요. 이렇게 소과를 본 이들이 한양으로 올라와 예조에서 주관하는 복시를 치르게 됩니다. 그리하여 성적순으로 1100명을 뽑습니다. 겨우 300명 떨어뜨린 거네요.

 

벼슬은 성적순으로

 

소과 복시까지 합격하면 생원이나 진사 직위를 받습니다. 일종의 석사 학위 같은 거라고 합니다. 그러면 지방 사회에서는 준지배층 대우를 받으며 제법 잘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멈추면 지방의 하급관리가 되는 것이고 대과를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니 욕심을 더 내는 것이 좋겠죠. 게다가 소과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당시 고급 유학 기관인 성균관 입학 특전이 주어집니다. 거기서 유학 교육을 받다가 대과를 치르게 됩니다. 물론 한성과 도별로 할당 인원이 있습니다. 초시는 240명 복시는 지역을 고려하지 않고 33명을 뽑습니다. 왜 33명인지 갑자기 궁금하네요. 아무튼 이 33명이 임금님 앞에서 시험을 보고 성적순으로 매겨 갑과 을과 병으로 반을 나눕니다. 병과는 23명을 뽑고 일반 합격자는 정 9품 작위를 받습니다. 을과는 7명을 뽑는데 정 8품의 벼슬을 받습니다. 그리고 갑과는 금은상 모드로 3명을 뽑는데 정 7품으로 갑니다. 여기서 장원급제자는 종 6품으로 가고요. 중요한 것은 시험의 합격자 순이 평생 따라다니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시에서 어떤 갑과 을과 병과냐가 출세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조선 시대 무과와 잡과

 

조선시대 비교적 문무를 겸비한 양반이 등장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무과는 문과와 달리 예비 시험이 없습니다. 곧바로 초시 복시 전시를 치릅니다. 전시에서 최종 합격자는 28명으로 상대적으로 적게 뽑습니다. 그리고 이 28명도 문과처럼 갑과 을과 병과로 나눕니다. 무과라고 해서 무조건 무예 능력만 보는 것은 아니고 무예와 병서, 유교 경전 시험을 봅니다. 진작부터 무과를 활성화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긴 합니다. 

 

 

 

잡과는 삼 년마다 실시되는 원칙이 있고 초시와 복시만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잡과 위상이 많이 떨어졌다고 하는데요. 46명 정원에 역과과 19명 율과가 9명 의과가 9명 나머지는 음양과에 속합니다. 문과는 임금님 앞에서 시험을 보지만 잡과는 해당 관청에서 주관합니다. 사역원, 전의감, 형조, 관상감 등을 일컫습니다. 여기서 음양과는 관상감이 주관하는데요. 이런 걸 보면 음양오행학 주역 등이 오래된 학문인 것을 현대인은 많이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안타깝긴 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MBTI테스트보다 훨씬 심오하고 철학적이고 과학적인데 말입니다.

 

조선 시대 추천제도

 

 

아무래도 옛날 시대가 천거나 되물림 제도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겁니다. 조선 시대에도 천거나 음서제도가 있었는데요. 그러나 벼슬을 하지 않은 사람이 천거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현직 관리를 대상으로 고관이나 학식이 높은 학자의 추천을 받았을 때 두 단계에서 네 단계 정도 승진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음서로도 관직에 오를 수 있지만 고관으로는 올라가기 어려웠습니다. 고관으로 올라가려면 따로 문과를 치러야 했습니다. 조선사회 관료제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나름 공정하고 엄격한 조선시대 인사관리에 관하여

 

조선 시대 정부 조직을 보면 비교적 공정하고 시스템이 잘 정비된 부분을 알 수 있는데요. 조선 왕조 500년이 이러한 정교함을 기반으로 운영된 것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한 예로 상피제도는 출신 지역의 지방 관리로 갈 수 없고 부자나 형제가 한 관서에 나란히 근무할 수 없는 등의 각종 규제를 두는 것입니다. 나름 비리 타파에 최선을 다한 흔적입니다. 체계를 잡기 위한 서경 제도도 있었는데요. 1 품부터 4품까지 대부자가 뒤에 붙습니다. 5품 이하는 뒤에 랑자가 붙고 대부가 붙어 있는 것은 임금이 인사권을 관리하여 서경이 붙지 않습니다. 그런데 5품 이하의 하급 관리는 서경, 즉 인사검증을 거쳐야 합니다. 즉, 5품 이하의 관리는 왕이 검증한다는 거죠. 그밖에 분경 금지법은 로비 금지법으로 관직 노비를 금하는 것입니다. 근무성적평가제도로 평가해서 승진이나 좌천 자료로 사용하는 것을 고가법이나 포폄법이라고 합니다. 행수 제도는 품계와 관직이 일치하지 않을 때 이것을 맞추기 위한 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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