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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책추천

by winter-art 2021. 10. 30.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새뮤엘 노아 크레이머, 박성식

 

인간의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정치적인 의회는 기원전 3000년경에 진지하게 열렸다. 우리의 의회와 흡사하게 양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연장자들의 회합인 상원과 전투에 임할 수 있는 하원이 그것이었다. 전쟁 가부를 놓고 상원은 평화를 왕은 거부권을 행사하고 문제를 하원으로 가져갔다. 하원은 전쟁과 자유를 선언했고 왕은 이를 승인했다.

 

 

인류 최초 의회가 열린 수메르 땅

 

인류에게 알려진 이 최초의 의회는 아시아 지역에서 열렸다. 바로 페르시아 만 북쪽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있는 고대 수메르로 알려진 땅이었다. 수메르 인들은 체계적인 철학을 전개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 특히 우주의 기원과 그 작용의 원리에 관하여 많은 사색을 했다. 수메르 현인들의 눈에 우주의 주요 구성요소는 하늘과 땅이었다. 우주를 가리키는 그들의 표현은 안-키 라는 합성어로 하늘-땅을 의미했다. 

 

원반형 지구설

 

 

땅은 편평한 원반이고 하늘은 둥근 아치 모양에 단단한 표에 의해 위 아래가 막힌 속이 빈 공간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일종의 최초의 원인이자 최고의 원동력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하늘이 땅에서 갈라지는 동안 움직이고 팽창하며 만들어진 것이 대기다. 그리고 이 대기로부터 해와 달, 행성과 별들과 같은 발광체들이 형성되었다. 하늘과 땅이 분리되고, 하늘에서 빛을 내는 존재들이 창조된 뒤,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이 존재하게 되었다.

 

 

수메르 신학자들은 일군의 살아있는 존재들로 구성된 만신전의 존재를 당연시하고 있었다. 이들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초인적이고 불멸의 존재들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잘 짜여진 계획과 적절한 율법에 따라 우주를 통제하고 인도해나갔다. 학자들의 이런 확신에 찬 가정의 배후에는 논리적인 추정이 놓여 있었다. 그들은 이런 존재들을 눈으로 직접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메르 사상가들

 

수메르 사상가들은 인간과 인간의 운명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이 흙으로 빚어졌고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음식, 마실 것, 그리고 안식처를 신들에게 제공하여 봉사함으로써 신들이 성스런 활동을 할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것이었다.

 

인간은 신들에 의해 정해진 운명을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에 삶이란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으로 가득 차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인간은 죽으면 무기력한 영혼만 남아 어둡고 황량한 저승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의 삶이란 지상의 삶의 음울하고 비참한 면의 복제판이다. 서양 철학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한 가지 근본적인 도덕적 주제이며, 민감한 자유의지라는 것이 수메르 사상가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수메르 사상가들은 죽음은 인간의 몫이고, 오직 신들만이 불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간의 의존적인 지위도 인정했다.

 

 

왜 신들은 죄와 악, 고통과 불행을 고안하고 창조하는 것이 필요했을까, 자료를 통해 판단하자면 수메르의 현자들은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고백하며 종종 신의 의지와 동기는 헤아릴 수 없다고 덧붙였다. 수메르 인의 의무는 부당한 듯이 보이는 불운을 당하더라도 따지거나 불평하는 대신에 도리 없는 죄와 몰락을 빌고, 한탄하고, 애도하고, 고백하는 것이었다.

 

수메르 점토판

 

 

 

수메르 인들이 점토에 문자를 새기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000년대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초기에는 단순한 행정기록만을 남겼으나 수세기가 지나는 동안 그들의 문자체계를 수정하고, 형성해나갔다. 이리하여 기원전 2500~2000년 사이에 수메르의 문자기술은 가장 복잡한 역사적.문학적 작문도 어렵지 않게 완성하여 표현할 수 있는 감각과 유연성을 갖추게 되었다. 기원전 1000년대 전반기에 우리는 수메르의 문학작품들이 새겨져 있는 수천 개의 점토판과 파편들을 발견하게 된다.

 

최초의 학교

 

우루크라는 수메르 도시에 수메르 학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2500년경에 이르면 수메르 전역에 걸친 상당수의 학교에서 문자가 공식적으로 교육되고 있었다. 학교체계가 발전한 것은 기원전 2000년대 후반기부터였다. 수메르 학교 본래 목적은 전문적인 직업인을 양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나라의 경제적. 행정적 필요, 각별히 신전과 왕궁의 그러한 면들을 충족시키는 필경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처음 설립되었다. 그렇게 늘어난 학교는 점차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에 더하여 현대의 학문기관과는 다르게 창작의 중심지 역할도 했다. 그 시대 대부분 학생들은 부유한 가정 출신이었으며 교육이 보편적이거나 의무적이지 않았다. 교육을 마친 후 대부분 왕궁에 봉사하는 필경사들이 되었지만 그 중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수메르 학교의 장은 전문가, 교수를 뜻하는 ‘움미아’였고 ‘학교 아버지’라고도 불렸다. 이에 반해 학생은 ‘학교 아들’이라고 불렸다. 조교수는 ‘큰 형제’라고 불렸다고.

 

학교에 도착하면 학생들은 점토판을 가지고 공부했고 암기가 교육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수메르 학교에는 단계적으로 향상되었다고 볼 수 있는 특성은 없었고 규율 문제에 있어서는 회초리가 쉴 틈이 없었다. 

 

수메르에서 발견된 최초의 촌지 그리고 청소년 문제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최초의 촌지도 발견되었다. 소년이 학교에 지각하여 벌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의 부모는 선생을 초대해 그에게 새 옷을 입히고 선물을 주고 빈 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이후 선생은 낙관적인 태도로 바뀌었다는 식의 에세이가 발견된 점으로 보아… 이런 일련의 일화들이 지난 한국의 교육 실태와 다르지 않다고 느껴지는 걸 보면 뿌리가 여기인가. 청소년 문제 또한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공부하기 싫어하고 반항하는 아들에게 끊임없이 학교에 가라고 재촉하고 찬란하고 자랑스러운 미래관을 이야기한다. 심지어 형과 비교하며 나무라기까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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