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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리뷰1

by winter-art 2021. 10. 29.

토인비, 역사의 연구, 홍사중 옮김, 동서문화사, 1978.

 

역사를 한 나라에 국한하지 않고 함께 겪은 경험의 관점으로 연구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는 엄청 재밌게 읽은 책이다. 오랜만에 다시 보니 처음 읽는 것처럼 뇌가 깨끗해졌길래 복습하는 차원에서 줄 친 부분 등 생각나는 대로 주절주절 나열해 보기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아테네는 또다른 방법으로 인구 문제에 대처하였다. 즉 수출을 목표로 하여 농업 생산을 전문화하고, 역시 수출을 위한 제조업을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경제적 혁신의 결과로 나타난 새로운 계급에게 정당한 정치적 권력을 부여하는 정치 제도를 발달시켰다. 그리하여 뜻밖에도 헬라스 사회 전체를 위한 새로운 진보의 길을  열어 놓았다.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정상에서 벗어났으며 이 두 그리스 국민이 시종일관 독특했을 뿐 전혀 발전이 없었다고 가정하지만 이들을 이해하기위해서는 전체에 주의를 집중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사회의 공간적 범위는 어느 면에 주의를 집중시켜야 하느냐에 따라서 상당히 차이기 생기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비슷한 지역에서 크게 4개의 문화, 특히 종교가 다른 문화 커뮤니티가 생겼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어쨌거나 토인비는 두 종류의 관계, 즉 동일한 사회 내부의 부분 커뮤니티들 간의 상호 관계와, 상이한 사회간의 상호 관계를 뚜렷이 구분지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스도교 창조력의 싹

 

그리스도교의 창조력의 싹은 헬라스 사회 자체의 것이 아니고 외부로 부터 온 것이다.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회는 로타르 시대(독일) 이후 로마제국이 붕괴되자 과도기적 동면기(약 375~675)에 새로운 등뼈로 개조되었다. 로타르 령이 서유럽 사회의 기본선이 된 것은, 로마의 최전선을 향해 북상해온 교회가 변방 민족들과 만나 결국 새로운 사회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교회와 변방 민족의 역사에 주의를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역사는 한니발 전쟁 때문에 입은 충격을 받음.

 

로마 멸망의 원인

 

 

 

 

 

로마는 아우구스투스 시대(bc27~ad14년)에 이르러 생기가 완전히 소멸했다. 토인비는 로마의 멸망을 이렇게 분석한다. 문명 수준이 높은 사회와 낮은 사회와의 사이에 있는 경계선이 그 전진을 멈추었을 때에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뒤떨어진 사회 쪽으로 유리하게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경계선을 돌파했을 때, 변방 민족들은 어째서 그 건너편에서 교회와 마주치게 되었는가. 한니발 전쟁 뒤 물질적인 면에서 경제적.사회적 혁명이 일어난 결과 동방 세계로부터 많은 노예가 끌려와 서방의 황폐한 지역에서 일을 하게 됨으로써 이 동방 노동자들의 뒤를 자연히 따라오게 된 동방의 갖가지 면에서서 내세에서 개인적인 구원을 약속하는 이들 종교가 그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의 운명을 구제하는 데 실패한 지배적 소수자의 영혼 속에서 씨를 뿌리기 적당한 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소수의 강자는 주입하고 다수의 약자는 흡수한다

 

소수의 강자는 주입하지만 다수의 약자는 흡수되기 마련이다. 이것을 동화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바보들 사이에 천재가 있으면 천재를 따라서 바보가 똑똑해지는 것이 아닌 천재가 바보가 될 수 있다는 말. 이건 전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임. 역사 연구의 단위는 국민 국가가 아닌 사회라고 이름 붙인 어떤 종류의 인간 집단이라고 봐야한다. 그러니까 현재 북한과 남한은 문화적 공통점을 찾을 수가 없어서 한민족이라고 부르기도 뻘쭘한 시대를 지나가 버렸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같은 민족이지만 다른 문화를 지닌 별개의 집단인 셈이다.

 

역사 연구의 단위

 

역사 연구의 단위는 인간 집단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사회가 다섯 개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로마  제국이 붕괴되고 난 뒤 헬라스 사회가 소멸되고 서유럽 사회가 출현하기까지 일종의 공백 기간이 계속 되었다. 공백 기간은 두 개의 제도가 활동함으로써 채워졌다. 하나는 그리스도교회이며 다른 하나는 변방 민족에서 넘어온 몇 개의 단명한 후계 국가들이다. 이 두 개의 세력을 헬라스 사회의 내적 무산자 계급과 외적 무산자 계급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둘 다 헬라스 사회의 지배적 소수자들이 이탈해 나갔다는 점은 똑같다. 사실 제국이 멸망했는데도 교회가 살아남은 것은 교회가 민중을 지도하고 민중의 충성심을 얻은 데 비해, 제국은 이미 오래전 부터 그 어느 쪽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죽어가는 사회 속에서 살아남은 교회는 거기에서 새로운 사회를 탄생시키는 모체가 되었다.

 

 

 

서유럽 사회가 헬라스 사회로서 탄생될 때까지 공백 기간 동안 북유럽의 삼림 지대에서 온 게르만 족과 슬라브 족, 유라시아의 스탭 사르마트 인과 훈족이, 아라비아 반도로부터는 사라센 인이, 아틀라스 산맥과 사하라 사막으로부터는 베르베르 인이 이동해 왔다. 이들은 공백 기간 또는 영웅 시대에 무대에서 활약한 셈인데 교회에 비하면 공헌도는 소극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거의 공백 기간이 끝나기 전에 샤를마뉴의 프랑크 왕국 아우스트라시아와 알프레드 대왕의 웨섹스 빼고 다 망했다. 서로 지들끼리 싸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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