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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연구 문명의 비교편

by winter-art 2021. 11. 5.

역사의 연구 그리스 정교 사회

 

그리스 정교 사회의 발상지는 비잔틴령의 아나톨리아이다. 이들은 북쪽과 동쪽 방향으로 뻗어 나가 러시아 및 시베리아 전역에 걸쳐 퍼져나갔고 동아시아 사회를 침범한다. 3세기 동안 분열 과정을 거치고 8세기 성상 파괴 논쟁으로 시작해 1054년 신학상 문제로 격렬한 싸움 끝에 끝이 났다. 분열된 두 사회의 교회는 뚜렷이 대립하는 정치적 성향을 띠었고 서방의 가톨릭 교회는 중세 교황제의 독립적인 권위 밑에서 중앙집권적으로 통일되었고, 그리스 정교회는 비잔틴 국가의 한 부분이 되었다. 30.

 

 

 

 

이슬람 사회

 

이슬람 사회의 세계 국가는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인 칼리프국이다. 칼리프국의 몰락과 함께 민족 이동을 해 온 것이 유라시아 스텝 지대의 투르크 및 몽골 유목민과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 유목민,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 유목민들이었다. 이 민족 이동으로 인해 거의 975년으로부터 1275년까지 3세기 동안 공백 기간이 생기는데 그 뒤의 연대는 이슬람 사회가 시작한 연대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 사회는 이란 사회와 아랍 사회라는 쌍둥이를 낳았다. 이슬람교도 수니파와 시아파의 두 파로 분열됐는데, 이는 이란 이슬람 사회와 아랍 이슬람 사회의 구분과는 달랐다. 그러나 16세기 제1.4반기에 시아파 이슬람교가 페르시아에 퍼지며 이란 이슬람 사회를 분열시켰다. 그 결과 시아파는 이란 이슬람 사회 주축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수니파는 이란 세계의 양끝에 있는 남과 서의 아랍 제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31.

압바스 왕조 칼리프국의 역사적 역할은 아케메네스 제국의 재편성과 재개, 외부 세력의 충격에 의해 봉쇄당한 정치 조직의 재편성, 그리고 외래인의 침입 때문에 중단된 사회생활의 국면을 다시 열어 놓은 데 있다. 33.

 

아케메네스 왕조

 

 

 

파괴자 역할을 한 것은 아시리아였다. 지나친 군국주의 때문에 자멸. 그 역할을 이어받은 것은 뜻밖에도 단역을 맡고 있던 아케메네스 왕조가 아시리아 인이 뿌린 씨앗을 거두어 들인 것이다. 34.

아케메네스 왕조가 수립되기 전 피정복자였던 아람인이 정복자인 아시리아인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뒤부터는 두 문화 요소의 긴밀한 관계가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우리는 이 동란기가 이란의 예언자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와 같은 시대의 이스라엘과 유대의 예언자들에게 같은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5. 이슬람교 창시자 모하메트는 순전히 사회 종교였던 유대교에서 영감을 얻었다.

 

 

인도사회

 

인도사회는 힌두 사회에서 비롯되었다. 굽타 왕조(375~475)에 세계종교는 힌두교였다. 몰락기에 접어든 굽타 제국으로 이동해 온 민족은 유라시아 스텝 지대의 훈족이었으며 그들은 동시에 로마 제국도 습격했따. 힌두 철학의 아버지라 물리는 샹카라가 활약한 것은 800년 경이었다.

 

 

중국 사회

 

중국 사회는 기원전 221년에 수립된 진.한으로 이어진 제국이다. 전국시대라 부르는 시대는 기원전 479년에 공자가 죽은 뒤로부터 2세기 반에 걸친 기간 동안이다. 무분별한 정치와 실천 생활의 철학으로 돌려진 활발한 지적 활동은 여타 사회와 비슷한 현상이다. 대승 불교는 중국 사회에 침투했고 중국 사회의 발상지는 황하 유역이며 거기서부터 양쯔강 유역으로 번져 동아시아 사회는 거기서부터 하나는 중국 해안선을 따라 남서 방향으로 퍼졌고 또 하나는 동북 방향을 따라 한국과 일본으로 퍼져 나갔다. 티베트와 몽골이 라마파 대승 불교도는 네스토리우스 교도에 해당한다. 이들은 헬라스 사회가 인도 세계로 침입하기 전에 화석이 되어버렸다.

 

 

 

헬라스 사회 이전의 이 세계 국가는 크레타 섬을 기선으로 하여 에게해의 재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유지되던 해양 제국이었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크레타 섬의 문명이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까지 존재 했다는 증거가 있는데 이 사회를 미노스 사회라고 이름 짓기로 한다. 42. 크레타 섬에 신앙이 존재했었다는 흔적을 찾아 본 결과 그 신봉자 속에는 동방 종교 즉 이란 종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 신자를 움직여 온 신앙과 유사한 것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결론적으로 여신의 형태를 한 신이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아마도 유일신교적인 숭배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헬라스 세계의 종교사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적인 엘레우시스의 비밀 의식이 부활되어, 트라키아의 디오니소스 제전(오르기아)와 크레타 섬의 제우스의 탄생과 죽음을 제사지내는 미노스 사회의 비밀 의식과 섞여서 성립된 오르피즘-닐손의 말을 빌면, 종교적 천재에 의해 창조된 사변적 종교였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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